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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2장 2막의 버킷리스트
고정혁기자2011년 08월 26일 17:09 분입력   총 880723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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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숙 | 유방암 10년

언제인가 TV에서 외국드라마가 방영 중이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얼굴을 익힌 낯익은 외국 배우들이 보여 무심코 보고 있으려니 암 선고를 받고 죽음을 목전에 둔 노년의 두 남자 이야기를 그린 영화였습니다. 성격이나 배경, 직업, 삶의 환경이 전혀 다른 노년의 두 남자는 코앞에 닥친 생명의 위급함을 좌절과 비관으로 낭비하기보다는 이제라도 남은 삶을 최상의 것으로 매듭짓기 위하여 마침내 둘만의 은밀한 의기투합을 합니다. 즉, 목숨이 다하기 전에 해봐야 할 것. 해야 할 일들의 목록-버킷 리스트를 작성하고 실행에 옮기고자 여행을 시작합니다.

아프리카의 초원 세렝게티에서 사냥하기,
눈물 나게 입이 째지도록 웃어보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성과 키스하기,
문신하기,
카레이싱과 스카이다이빙 하기,
가장 멋지고 장엄한 광경 두 곳 보기,
화장한 재를 깡통에 담아 경관 좋은 곳에 두기 등등.

목록을 지우며 또 더해 가기도 하면서 두 남자는 많은 것을 서로 공유하게 됩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인생의 희로애락, 삶의 의미, 웃음, 통찰, 감동, 우정을 가감 없이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환상적인 경치 좋은 곳에 덧없는 육신을 태운 재가 담긴 깡통이 놓이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고려인삼공사에서 암으로 투병중인 환우와 가족들을 초대해주셔서 연이어 세 번째의 태안바닷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미 구면이 되어 낯익은 얼굴들을 마주하는 반가움은 특별한 경험입니다. 일 년 만의 만남이지만 찬찬히 되짚어보면 엄청난 다행이 유지되어야만 한다는 전제가 필요한 것이라는 깨달음에 이르고 보면 안녕하시냐! 반갑습니다! 라는 이 인사가 그저 인사만이 아닌, 허투루 나오는 형식적인 언어가 아닌 것을 흠칫 소스라치게 알게 됩니다.

암으로 투병중인 사람들이라면 진심으로 작년에 봤던 얼굴을 올해 또 볼 수 있는 이 생명확인의 사실이 진실로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인지 알 것입니다. 바람결에 소문 결에 이미 가고 없는 환우들의 소식을 들을 때, 시린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한줄기 바람소리 같은 헛헛함이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모를 일이기도 합니다.

올해는 예년과는 달리 많은 분들이 동참했고 각기 다른 환경과 상황 속에서 투병하는 이야기들을 듣고 참고할 수 있어서 더욱 뜻 깊었던 것 같습니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듯한 일직선의 수평선. 발바닥을 간질이는 듯 다정한 감촉의 개펄. 그 개펄 아래에도 이루 다 셀 수 없이 다양한 미물들이 똬리를 틀고 자신만의 보금자리를 인간에게 침노당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그 질긴 생명력의 자잘한 무리들. 사람으로서는 감히 만들지 못할 파도의 작품, 그 신비하고 경이로운 기하학적인 무늬들, 리듬처럼 들숨과 날숨을 멈추지 않는 파도들의 호흡을 음악처럼 들으며 잠들고…….

해안가 이 끝에서 저 끝까지를 걸으며 떠나보내야 할 것들과 더욱 부둥켜안고 살아야 할 것들을 곰곰이 셈해 보았었습니다. 셈한다고 하지만 어느 것이 남고 어느 것이 모자란 건지, 무엇을 남겨야 할 건지 도대체 정답이 없고 낯설기만 한 것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정답은 늘 공란이 되기 일쑤이지요.

캠프에 갈 때마다 주인장들의 한결같은 환대와 성실함에 적잖이 놀라고 감동하게 됩니다. 거짓 없는 마음으로부터의 정성을 다한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는 느낌. 저절로 축복과 번영을 빌어주게 됩니다. 돈을 벌어 이렇게 알게 모르게 소문내지 않고 알뜰히 최선을 다해 참 잘 쓰는 분들을 볼 때의 흐뭇함. 매년 뜨겁게 느낍니다.

연륜 따라 이제 경력이 붙어 더욱 화려해지고 다채로워진 우리의 웃음제조기! 금순 언니도 빼놓을 수 없지요. 그동안 방송도 타고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는 중이란 것을 뒤늦게 접했습니다. 웃음이 진하면 슬픔과도 맞닿는 걸까요. 그녀가 중간 중간 털어놓는 슬픈 개인사도 희극처럼 내려놓는 재주에 비극과 희극은 샴쌍둥이처럼 서로 맞붙어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웃음은 정말 고마운 선물입니다. 거침 없는 웃음소리에 궁금해서 살금살금 엿보러 왔던 청솔모도 저만큼 놀라 달아납니다.

그렇습니다. 암 선고를 받았고 의사의 지시에 따라 선택이기는 하지만 이런저런 수술과 치료로 하루하루가 외줄사다리를 타는 듯 위기위식을 느끼며 회색모드의 불안한 터널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듯 대범하게 살려 해도 이 사실만은 항상 낙인처럼 가슴에 걸려 행동의 제약과 자유를 저지당하고는 합니다.

저 터널 앞에 무엇이 기다릴지, 누가 어떤 얼굴로 나를 맞아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왕 가는 것. 어차피 암과 함께 가는 삶에 저는 환희의 칼라를 입혀 주렵니다. 세상의 온갖 좋은 단어들로만 지어진 집 속에 저를 들여놓으렵니다. 명랑하고 화사한 얼굴을 하고 노래하는 새처럼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지줄 지줄 읊조리렵니다. 내 인생의 2막 2장의 무대를 다시 올리렵니다.

당신의 버킷 리스트!
공백의 그 줄 빈칸에 무엇을 적으시렵니까.
한탄할 그 무엇들은 냅다 팽개치고 함께 가시지요.
시간이 많지 않은 것 같다면, 상황이 별로 신통치 않다면,
그것은 우리의 머리와 가슴의 한계상황을 시험하는 것일 겁니다.

한번 왔다가는 내 삶은 어차피 내가 가꿔가는 것이겠기에,
모든 어둠과 빛의 그늘 아래 빚어진 열매들도 나의 것. 내가 낳은 나의 새끼인 것을.
그러므로 한 줄 한 칸 침 발라가며 또박또박 함께 써내려가자고요.
내가 해야 할 것. 내가 해보고 싶은 것.
이제 다 쓰셨으면 2장 2막 무대의 막을 올려볼까요!

하나!
둘!
셋!

진실로 바라기는 내년에 또 싱그러운 태안의 바닷가를 마주하고 내가 했었던, 그리고 완성형을 향하여 현재진행형인 버킷리스트의 메모목록을 서로 펼쳐가며 유쾌 통쾌 상쾌하게 웃을 수 있기를…….

뒤로월간암 2011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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