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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노란색 고무밴드
구효정(cancerline@daum.net)기자2024년 09월 23일 15:19 분입력   총 136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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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철우(수필가)
노란색은 겨울이란 무채색의 계절을 견뎌낸 후 처음 만나는 원색이다. 시인성(視認性)이 뛰어난 노란색이 격정의 감각으로 시선에 꽂히는 순간은 겨울이란 고난을 이겨내고 마침내 다다른 봄이라는 극단적 대비 때문인지도 모른다. 개나리와 산수유, 생강나무, 복수초 등이 모두 노란색 꽃을 피우는 식물들이다. 본격적인 광합성을 시작하지 못한 이른 봄, 남은 영양분을 모아 꽃을 피우고 새로운 잎을 만들어 내야 하는 이들에게 본래 나뭇잎 속에 들어있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지 않은 노란색이야말로 꽃을 피우는 데 가장 효율적이다. 그러니 이른 봄, 대지를 덮는 자연의 색은 누가 뭐래도 노란색이다.

내 책상 아래에서도 산뜻한 노란색을 만날 수 있다. 예닐곱 개의 고무밴드를 뭉뚱그려 같은 힘을 받도록 해놓은 것이, 보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하다. 4주에서 10주 간격으로 병원에 다닌 지 벌써 27년째. 병원에서 주는 십여 가지의 약들이 서로 섞이지 않도록 고무밴드에 묶여 손에 들어왔다. 집에 돌아와 약을 정리하고 나면 덩그러니 남겨지는 열 개 남짓한 고무밴드. 이미 쓰임을 다한 사물을 돌아볼 정신적 빈자리를 찾는 것은 당시의 내게는 사치였다. 그렇게 세월의 흐름에 몸을 던진 채 함께 흘러가기를 몇 해. 원래 길이의 10배까지 늘어날 수 있는 고무줄의 탄성한계(彈性限界)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반나절을 사용한 고무밴드가 아닌가. 어딘가에 쓸 수 있겠다는 생각에 책상 서랍에 스무 개쯤 모아 두었는데, 마침 집사람이 ‘청소할 때마다 거추장스럽고, 먼지가 쌓이면 화재의 위험이 있다’라며 책상 아래에 놓인 멀티탭 정리를 부탁했다. 가만히 보니 멀티탭을 책상다리 면에 붙여 바닥에서 띄워 놓으면 해결될 문제였다. 멀티탭의 한쪽에는 구멍이 있어서 책상다리 면에 접착식 고리를 붙이고 끼우면 쉽게 고정되었으나 나머지 한쪽이 문제였다. 접착식 고리에 고정할 무엇이 필요했다. 그때 스친 생각이 바로 고무밴드. 손에 잡히는 몇 가닥의 고무밴드를 집어 멀티탭의 몸통을 한 바퀴 돌려 고리에 걸어 보니 안성맞춤으로 책상다리의 면에 고정되는 게 아닌가. 불필요한 존재로만 취급받던 고무밴드가 두 번째 임무를 부여받은 순간이었다.

책상 아래 어두운 공간 속의 하얀 멀티탭과 노란색 고무밴드는 책상 앞에 앉을 때마다 시선을 끌어당긴다. 버리지 않고 모아놓은 결정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아 스스로 대견한 마음과 함께 힘을 모아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녀석들의 모습이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오늘 의자에 앉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고리에 의지한 채 멀티탭을 들어 올리고 있던 고무밴드 하나가 끊어져 있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끊어진 부분만 보일 뿐 나머지 부분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있다. 함께 뒤엉킨 다른 고무밴드들이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 온몸으로 동료의 시신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바닥에 내려앉아 휴대전화의 조명까지 켜고 들여다보니 끊긴 단면이 거친 것으로 보아 이미 탄성한계를 넘어선 게 틀림없었다. 24시간 쉼 없이 임무 수행을 했으며, 멀티탭의 열기까지 더해져 한계에 좀 더 일찍 다다른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왜 첫 번째였을까. 다른 고무밴드들보다 작게 만들어진 까닭에 한계에 일찍 도달했을까? 아니면 태생적으로 약했을까? 열기에 조금 더 가까워서 한계를 단축했을까? 질문은 꼬리를 물다가 몸이 아파 휴학하던 중학교 3학년, 그날의 기억이 예고도 없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휴학계를 제출하러 어머니가 학교에 가시자, 혼자 남겨진 나는 누워서 창밖 풍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고, 구토가 나올 정도로 하얀 구름은 생각보다 빠르게 창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어디서 잘못된 걸까?’라는 질문은 비문증처럼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으며, 부모님 역시 불면의 밤을 보내며 던졌을 같은 질문을 나 역시 되뇌고 있었다. 그 고무밴드처럼 남들보다 먼저 끊어질 수도 있을 거라는, 죽음에의 공포는 이미 중학생 때부터 가슴 속에서 싹을 틔우고 있었다.

이미 옅어진 색만으로도 고무밴드의 고단함을 느낄 수 있기에 정기적으로 교체하는 것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로 했다. 그리고 크기가 비슷하고 튼실해 보이는 녀석으로만 멀티탭을 고정하는 임무를 주기로 했다. 어차피 고무밴드는 계속 손에 들어올 것이므로. 그리고 작거나 얇은 녀석들에게는 어렵지 않은 다른 임무를 주기로 했다. 그렇게 찾아낸 것이 비누 받침대 보조 역할이었다. 쇠로 된 비누 받침대는 비누가 닿으며 쉽게 조각나 손실이 큰 단점이 있었다. 더구나 물이 묻은 손으로 비누를 잡는 게 미끄러워 가끔 화장실 바닥에 곤두박질 쳐대곤 했다. 비누 받침대에 가로세로로 몇 줄의 고무밴드를 감아두니 비누가 허공에 뜬 느낌이다. 사용한 비누가 잘 건조되어 손에서 미끄러지는 일도 현저히 줄어들고, 불필요한 손실도 없어졌다. 심한 업무 강도도 아닌 데다가 전기나 열기 등과 가까운 환경도 아니며, 물기를 가까이하여 색감이 짙어진 노란색은 봄의 개나리처럼, 병아리처럼 삶을 막 시작하는 싱그러움마저 든다. 이런 임무라면 고무밴드의 탄성한계보다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자, 이제 누군가 나타나 탄성한계에 이르러 닿고 있는 나를 위해 새로운 임무를 주는 날은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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