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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세포의 비상 탈출구 봉쇄
구효정(cancerline@daum.net)기자2026년 02월 28일 19:44 분입력   총 142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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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한 DNA 복구 트릭, 오히려 암을 무너뜨릴 ‘아킬레스건’이 되다.
우리 몸속에서는 매일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진다. 세포의 설계도인 DNA는 자외선, 화학 물질, 혹은 자연적인 대사 과정 등 수많은 요인에 의해 끊임없이 공격받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손상은 DNA의 두 가닥이 동시에 뚝 끊어지는 ‘이중 가닥 절단(Double-strand break)’이다.

정상적인 세포라면 정밀한 수리공들이 출동하여 이 손상을 깔끔하게 복구한다. 하지만 암세포는 다르다. 때로는 정상적인 수리 시스템이 고장 나 벼랑 끝에 몰리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 미국 스크립스 연구소(Scripps Research) 연구진이 암세포가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용하는 ‘위험한 꼼수’를 발견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 꼼수가 암세포를 잡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했다.

엉켜버린 실타래, R-루프(R-loops)의 위협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 몸의 유전 물질이 겪는 곤란한 상황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DNA는 생명 유지에 필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긴 끈과 같다. 세포는 이 정보를 읽어 단백질을 만들기 위해 RNA라는 복사본을 만들어낸다.

보통은 복사가 끝나면 RNA는 DNA에서 깔끔하게 떨어져 나와야 한다. 그런데 가끔 마치 지퍼가 천에 씹히거나 실타래가 엉키듯, 새로 만들어진 RNA가 DNA 가닥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는 경우가 생긴다. 이렇게 RNA와 DNA가 뒤엉킨 덩어리를 ‘R-루프(R-loops)’라고 부른다.

스크립스 연구소의 샤오화 우(Xiaohua Wu) 교수는 “R-루프는 세포 기능에 필요하기도 하지만, 엄격하게 통제되지 않으면 DNA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시한폭탄과 같다”고 설명한다. 엉킨 실타래를 풀지 않고 억지로 당기면 실이 끊어지듯, R-루프가 쌓이면 DNA가 손상되기 쉽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세포에는 이 엉킨 실타래를 전문적으로 풀어주는 해결사가 있다. 바로 ‘세나탁신(SETX)’이라는 단백질이다. 세나탁신은 꼬인 유전 물질을 풀어주는 효소(헬리카제)의 일종으로, R-루프가 위험수위로 쌓이지 않도록 청소하는 역할을 한다.

해결사가 사라진 암세포의 위기
문제는 이 해결사(SETX)가 사라지거나 고장 났을 때다. 루게릭병(ALS) 같은 신경 질환뿐만 아니라, 자궁암, 피부암, 유방암 등 일부 암세포에서는 SETX 유전자에 변이가 생겨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해결사가 없으니 R-루프는 걷잡을 수 없이 쌓인다. 엉킨 부분에서 DNA는 뚝뚝 끊어지는 ‘이중 가닥 절단’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엉망진창이 된 현장 때문에 정상적인 정밀 복구 시스템은 접근조차 할 수 없다.

우 교수의 연구팀은 바로 이 지점에 주목했다. “해결사(SETX)가 없는 암세포는 이 엉망인 상태에서 도대체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일까?” 연구팀이 관찰한 결과, 암세포는 생존을 위해 매우 공격적이고 거친 방식을 선택했다. 바로 ‘파손 유도 복제(Break-Induced Replication, 이하 BIR)’라고 불리는 비상 복구 시스템을 가동한 것이다.

암세포의 꼼수, ‘대충 때우기(BIR)’ 전략
정상적인 DNA 복구가 ‘장인의 도자기 수선’이라면, 암세포가 선택한 BIR 방식은 ‘청테이프로 대충 감아버리는 것’과 비슷하다. BIR은 원래 복제가 멈췄을 때 사용하는 비상 수단이다. 깨진 부위를 정교하게 맞추는 대신, 아주 긴 DNA 구간을 통째로 복사해서 억지로 이어 붙인다. 이 방식은 속도는 빠르지만, 오류가 많이 발생하고 유전 정보를 엉망으로 만들 위험이 크다.

우 교수는 이를 두고 “마치 엉성한 긴급 보수팀이 투입되어 열심히 일은 하지만, 실수를 연발하는 것과 같다.”라고 비유했다.

연구팀의 발견에 따르면, SETX가 없어서 R-루프가 쌓이면 DNA가 끊어진 끝부분이 과도하게 깎여나간다. 이렇게 흉하게 드러난 DNA 조각이 신호탄이 되어, 평소에는 잘 쓰지 않던 BIR 시스템(PIF1이라는 단백질 등)을 긴급 호출한다. 암세포 입장에서는 품질이야 어떻든 일단 죽지 않고 살기 위해 선택한 최후의 수단인 셈이다.

약점이 된 생존 전략: ‘합성 치사’의 원리
여기서 이번 연구의 가장 핵심적이고 희망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암세포가 BIR이라는 비상 수단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는 사실, 바로 그 자체가 암세포의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이를 의학 용어로 ‘합성 치사(Synthetic Lethality)’라고 한다.

쉽게 설명해 보자.
정상 세포: [정밀 복구 시스템(SETX)]과 [비상 복구 시스템(BIR)]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 하나가 막혀도 다른 하나로 살 수 있다.
암세포(SETX 결핍): 이미 [정밀 복구 시스템]이 고장 났다. 오로지 [비상 복구 시스템(BIR)] 하나에만 매달려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약물을 써서 [비상 복구 시스템(BIR)]을 차단해 버리면 어떻게 될까? 정상 세포는 멀쩡한 정밀 복구 시스템이 있으니 끄떡없다. 하지만 암세포는 유일한 생명줄이 끊어지면서 즉시 사멸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부작용은 줄이고 암세포만 골라 죽이는 표적 치료의 원리다.

연구팀은 특히 PIF1, RAD52, XPF라는 세 가지 단백질이 암세포의 비상 복구(BIR)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우 교수는 “이 단백질들은 정상 세포에게는 필수적이지 않다. 따라서 이것들을 억제하면 정상 세포는 건드리지 않고 SETX가 결핍된 암세포만 선택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더 넓은 암 치료를 향하여
이번 연구 결과가 더욱 고무적인 이유는 단순히 희귀한 유전자 변이가 있는 암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R-루프가 쌓이는 현상은 SETX 변이뿐만 아니라, 유방암에서 에스트로겐 호르몬 신호가 과다하거나 특정 발암 유전자가 활성화될 때도 흔히 발생한다. 즉, 비상 복구 시스템(BIR)을 표적으로 하는 치료법이 개발된다면 유방암을 포함한 훨씬 광범위한 종류의 암 치료에 적용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당장 내일 병원에서 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 교수는 “이제 막 BIR 시스템을 억제할 수 있는, 효과적이고 독성이 낮은 후보 물질을 탐색하는 단계”라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연구팀은 현재 어떤 암이 R-루프를 가장 많이 축적하는지, 어떤 환자에게 이 치료법이 가장 효과적일지 파악하기 위한 후속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마치며: 엉킨 실타래를 푸는 희망
암세포는 끊임없이 변이하고 진화하며 살아남으려 발버둥 친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그 생존 본능 속에 숨겨진 틈을 기어이 찾아내고 있다. 암세포가 살기 위해 선택한 ‘위험한 꼼수’가 결국 자신의 무덤을 파는 결과가 될 줄은 암세포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이번 연구는 우리 몸의 가장 깊은 곳, DNA 차원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양상을 뒤바꿀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 보이는 암 치료의 길, 과학자들은 그 매듭을 하나씩 풀어가고 있다. 그 끝에는 분명 ‘완치’라는 곧게 뻗은 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편집실에서]
알아두면 쓸모 있는 의학 용어
기사를 읽다가 생소한 단어 때문에 고개를 갸웃하셨나요? 핵심 용어를 알기 쉽게 풀어드립니다.

이중 가닥 절단 (Double-strand break): DNA는 두 줄이 꼬여 있는 사다리 모양입니다. 이 두 줄이 동시에 뚝 끊어지는 사고를 말합니다. 세포는 가장 치명적인 손상이라 즉시 고치지 않으면 세포가 죽거나 암이 됩니다.
R-루프 (R-loops): DNA에서 정보를 복사한 RNA가 떨어지지 않고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DNA-RNA가 엉켜버린 상태입니다. 이게 많아지면 DNA가 불안정해지고 잘 끊어집니다.
세나탁신 (SETX): 엉킨 R-루프를 풀어주는 해결사 단백질입니다. 암세포 중에는 이 단백질이 고장 난 경우가 많습니다.
파손 유도 복제 (BIR): 우리 몸의 정밀 수리공이 아닌, 거칠고 엉성한 비상 수리공입니다. 암세포가 위기 상황에서 사용하는 부정확한 DNA 복구 방식입니다.

합성 치사(Synthetic Lethality), 암을 잡는 ‘원투 펀치’
현대 항암 치료의 가장 핫한 키워드 중 하나인 ‘합성 치사’는 쉽게 말해 ‘외나무다리 끊기’ 전략입니다.

1. 어떤 유전자 A와 B가 있습니다. 둘 중 하나만 망가지면 세포는 다른 하나를 써서 살 수 있습니다.
2. 하지만 A와 B가 동시에 망가지면 세포는 죽습니다.
3. 암세포는 이미 유전자 A(예: SETX)가 망가져 있는 상태입니다. (외나무다리에 서 있음)
4. 이때 치료제로 유전자 B(예: BIR 시스템)를 망가뜨려 버립니다. (다리를 끊음)
5. 정상 세포는 유전자 A가 멀쩡하므로 B를 공격해도 살아남지만, 암세포는 도망갈 곳이 없어 죽게 됩니다.

이 원리는 이미 유방암 치료제(PARP 억제제) 등에 사용되고 있으며, 이번 연구를 통해 더 다양한 암 치료에 적용될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참조]
Tong Wu et al., "Break-induced replication is activated to repair R-loop-associated double-strand breaks in SETX-deficient cells", *Cell Reports*, 2025. (이 기사는 최신 연구 논문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뒤로월간암 2026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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