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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민 A의 두 얼굴, 암세포의 ‘은신처’가 될 수 있어
구효정(cancerline@daum.net)기자2026년 02월 28일 19:47 분입력   총 252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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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대 연구진, 암세포가 면역을 피하는 ‘이중 첩자’ 원리 규명
우리는 흔히 암에 걸리면 “잘 먹어야 낫는다”고 말하며 각종 영양소를 꼼꼼히 챙긴다. 그중에서도 비타민 A는 면역력을 높여주고 세포 재생을 돕는 필수 영양소로 알려져 있어 많은 환우가 중요하게 생각한다. 당근이나 시금치 같은 녹황색 채소에 풍부한 이 비타민이 우리 몸을 지켜줄 것이라 굳게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우리가 굳게 믿었던 비타민 A가 암세포와 만나면 오히려 암세포가 우리 몸의 면역 체계를 피해 숨도록 돕는 ‘이중 첩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충격적인 연구 결과가 나왔다. 프린스턴 대학교 루드비히 암 연구소 연구팀이 밝혀낸 이 사실은 그동안 의학계가 풀지 못했던 오랜 수수께끼를 해결하며 새로운 치료의 길을 열어주고 있다.

100년의 미스터리, ‘비타민 A의 역설’
사실 과학자들 사이에서 비타민 A는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었다. 실험실 샬레(배양 접시)에 암세포를 놓고 비타민 A를 투여하면 암세포가 성장을 멈추거나 죽는 모습이 관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때는 비타민 A가 강력한 항암제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막상 사람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임상 시험에서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곤 했다. 비타민 A 보충제를 과다 섭취한 그룹에서 오히려 암 발병 위험이 높아지거나, 사망률이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실험실에서는 암을 죽이는데, 왜 사람 몸속에서는 암을 키울까?” 이 알 수 없는 ‘비타민 A의 역설’ 뒤에는 우리 몸의 복잡한 면역 시스템과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암세포의 전략이 숨어 있었다.

아군을 적으로 만드는 물질, ‘레티노산’
비타민 A가 우리 몸에 들어와 대사 과정을 거치면 ‘레티노산(Retinoic acid)’이라는 물질로 변한다. 연구팀은 바로 이 레티노산이 문제의 열쇠임을 밝혀냈다. 우리 몸에는 암세포나 바이러스 같은 적이 침투하면 이를 가장 먼저 알아채고 공격 명령을 내리는 사령관, ‘수지상세포(Dendritic Cells)’가 있다. 수지상세포가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공격부대인 T세포가 암세포를 찾아가 무찌를 수 있다. 그런데 연구 결과, 수지상세포나 암세포 주변에서 생성된 레티노산이 이 사령관의 눈을 가려버리는 것으로 드러났다. 레티노산은 수지상세포에게 “공격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는 잘못된 신호를 보내고, 심지어 암세포를 공격하는 대신 보호해 주는 ‘조절 T세포(Tregs)’를 불러 모으게 만든다.

즉, 암세포는 비타민 A에서 나온 레티노산을 이용해 자신을 공격해야 할 면역 세포들을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주변을 안전한 은신처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암 백신이 실패했던 이유를 찾다
이 발견은 그동안 개발된 수많은 ‘암 백신’이나 면역 치료제가 기대만큼 효과를 내지 못했던 이유도 설명해 준다. 암 백신은 환자의 면역 세포를 훈련시켜 암을 공격하게 만드는 치료법이다. 하지만 아무리 밖에서 면역 세포를 강력하게 훈련시켜 몸속에 넣어줘도, 종양 주변에 이미 레티노산이 가득하다면 훈련받은 세포들이 힘을 쓰지 못하고 무장해제 되어버린다.

연구를 주도한 차오 팡 박사는 “우리가 흔히 암 백신을 만들 때 사용하는 방식이 의도치 않게 레티노산을 많이 만들어내고 있었고, 이것이 오히려 백신의 효과를 떨어뜨리는 브레이크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면역의 힘을 되찾아줄 새로운 무기
하지만 절망할 필요는 없다. 원인을 알면 해결책도 보이는 법이다. 연구팀은 레티노산이 만들어지는 공장 역할을 하는 효소(ALDH1a2, ALDH1a3)를 찾아냈고, 이를 멈추게 하는 새로운 약물(KyA33 등)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쥐를 이용한 실험 결과는 매우 희망적이다. 이 약물을 투여하여 레티노산 생성을 차단하자, 잠들어 있던(혹은 속고 있던) 수지상세포들이 다시 깨어나 암세포를 맹렬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또한 기존의 암 백신과 이 약물을 함께 사용했을 때, 암세포의 성장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생존 기간이 늘어나는 강력한 치료 효과를 확인했다.

암 정복을 향한 위대한 발걸음
이번 연구는 비타민 A 섭취를 무조건 중단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핵심은 암세포가 우리 몸의 영양소를 이용해 면역을 회피하는 경로를 차단할 방법을 찾았다는 것에 있다. 강이빈 교수는 “이번 연구는 약리학 분야의 오랜 난제를 해결한 쾌거”라며, “앞으로 이 원리를 이용한 신약이 개발되면, 기존 면역 항암제의 한계를 뛰어넘어 더 많은 환우에게 완치의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암세포가 쳐놓은 짙은 안개를 걷어내고, 우리 몸의 면역 군대가 다시 힘을 낼 수 있게 돕는 기술. 머지않아 이 기술이 임상 현장에 적용되어 환우들의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기를 기대해 본다.

[참조]
1. Cao Fang et al., "Targeting autocrine retinoic acid signaling by ALDH1A2 inhibition enhances antitumor dendritic cell vaccine efficacy", *Nature Immunology*, 2026.
2. Mark Esposito et al., "Development of retinoid nuclear receptor pathway antagonists through targeting aldehyde dehydrogenase 1A3", *iScience*, 2025.
뒤로월간암 2026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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