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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 한 방울과 빛, 숨은 암세포를 찾아내다
구효정(cancerline@daum.net)기자2026년 04월 30일 19:33 분입력   총 67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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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 영상에도 안 보이는 초기 암, 초정밀 광학 센서로 잡아내는 시대
암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의료진과 환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뒤늦은 발견’이다. 몸에 이상을 느끼고 병원을 찾아 CT(컴퓨터 단층촬영)나 MRI(자기공명영상)를 찍었을 때, 화면에 뚜렷한 종양 덩어리가 보인다면 이미 암이 꽤 진행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만약 종양이 자라나기 훨씬 전, 우리 몸속에 아주 미세한 암세포가 생겨나기 시작한 그 찰나의 순간을 미리 알아챌 수는 없을까? 최근 중국 선전 대학교(Shenzhen University)의 장 한(Han Zhang) 교수 연구팀이 <옵티카(Optica)> 저널에 발표한 놀라운 연구 결과가 이 간절한 물음에 답을 내놓았다.

연구팀은 단 한 번의 가벼운 채혈(피 뽑기)만으로, 영상 기기에는 잡히지도 않는 극초기 단계의 암 신호를 잡아내는 ‘초정밀 빛(광학) 센서’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암세포가 남긴 미세한 발자국, ‘바이오마커’를 찾아라
암세포가 우리 몸에 생겨나면, 비록 크기는 아주 작을지라도 핏속에 자신만의 고유한 흔적을 남기게 된다. 특정한 단백질이나 떨어져 나온 DNA 조각들이 피를 타고 흘러 다니는데, 이를 의학 용어로 ‘바이오마커(생체표지자)’라고 부른다.

바이오마커는 암이 몸속에 있는지, 얼마나 빠르게 자라고 있는지, 혹은 암에 걸릴 위험이 얼마나 높은지를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신호탄이다. 문제는 암의 극초기 단계에서는 피 속에 떠다니는 이 바이오마커의 양이 말 그대로 ‘태평양 바다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처럼 극히 적다는 점이다. 기존의 혈액 검사 장비로는 이 미세한 발자국을 도저히 찾아낼 수 없었다.

기존에는 이 미세한 신호를 억지로 뻥튀기(화학적 증폭)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이 과정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용도 비싸며, 무엇보다 엉뚱한 신호까지 같이 증폭되어 오류가 생길 위험이 컸다.

빛, 유전자 가위, 퀀텀닷이 만든 ‘기적의 덫’
장 교수 연구팀은 복잡한 뻥튀기 과정 없이, 아주 미세한 신호라도 그 자체를 맑고 투명하게 읽어내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덫(센서)’을 설계했다. 이 덫을 만들기 위해 현재 과학계에서 가장 뛰어난 세 가지 첨단 기술이 총동원되었다.

첫째, 뼈대가 된 것은 뜻밖에도 ‘DNA’다. 연구팀은 생명체의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DNA를 단순한 생물학적 물질이 아니라, 나노(10억 분의 1미터) 크기의 초미세 ‘레고 블록’처럼 활용했다. DNA를 조립해 작고 안정적인 피라미드 모양의 뼈대를 세운 것이다.

둘째, 뼈대 위에 ‘퀀텀닷(양자점)’이라는 특수 조명을 달았다. 이 조명은 빛을 받으면 특정 신호를 강하게 반사하는 성질이 있다. 특히 연구팀은 ‘제2 고조파 발생(SHG)’이라는 빛의 원리를 이용했다. 쉽게 말해, 센서에 빛을 쏘면 잡음은 싹 걸러지고 오직 우리가 원하는 맑고 선명한 빛의 신호만 튕겨 나오게 만든 것이다.

셋째, 덫의 문을 닫을 사냥꾼,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를 배치했다. 이렇게 정교하게 만들어진 센서 위에 크리스퍼 단백질(Cas12a)을 올려두었다. 이 유전자 가위는 암세포의 바이오마커를 귀신같이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 환자의 혈액 속에 숨어있던 아주 미세한 암세포의 흔적이 센서에 닿는 순간, 유전자 가위가 작동해 퀀텀닷 조명을 고정하고 있던 DNA 뼈대를 싹둑 잘라버린다.

뼈대가 잘리면서 조명이 떨어져 나가면, 센서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의 신호가 순간적으로 뚝 떨어지게 된다. 바로 이 ‘빛이 줄어드는 찰나의 변화’를 통해 핏속에 암세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아채는 원리다.

폐암 환자의 혈액에서 증명된 압도적인 성능
이 기발한 아이디어는 과연 실제 사람의 피 속에서도 통했을까? 연구팀은 폐암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알려진 특정 마이크로RNA(miR-21)를 표적으로 삼고, 실제 폐암 환자들에게서 채취한 혈액(혈청)을 센서에 떨어뜨려 보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센서는 비슷한 모양을 가진 다른 가짜 RNA 조각들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고, 오직 폐암을 알리는 바이오마커만 정확하게 찾아내어 빛의 신호를 바꿨다. 그것도 단 몇 개의 분자만 존재하는, 기존 검사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극도로 낮은 농도에서도 완벽하게 작동했다.

장 교수는 “DNA를 레고 블록처럼 활용하여 나노미터 수준의 정밀도를 구현한 덕분에, 빛의 잡음을 최소화하면서도 복잡한 증폭 과정 없이 빠르고 정확한 진단이 가능해졌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건강한 미래를 위한 일상의 혈액 검사
이 기술이 우리의 일상 병원에 도입된다면 암 치료의 패러다임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가장 먼저, 무서운 방사선을 쪼이며 CT 촬영을 하기 전, 동네 병원이나 건강검진 센터에서 피를 뽑는 것만으로 극초기 폐암이나 기타 치명적인 암들의 징후를 알아챌 수 있게 된다. 발견이 빠를수록 완치율이 급격히 올라가는 암의 특성상,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든든한 예방책이 될 것이다.

또한, 현재 암 투병 중인 환우들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 지금은 항암제가 내 몸에 잘 듣고 있는지 확인하려면 약을 투여하고 몇 달을 초조하게 기다렸다가 다시 CT를 찍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 기술이 상용화되면 매주, 혹은 매일 간단한 채혈만으로도 핏속의 암 수치(바이오마커)가 얼마나 줄어들고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다. 환자에게 딱 맞는 치료법(맞춤형 치료)을 실시간으로 수정하고 적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병원을 넘어 환자의 곁으로
연구팀의 다음 목표는 현재 실험실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이 광학 센서 시스템의 크기를 획기적으로 줄여, 휴대가 가능한 소형 기기로 만드는 것이다. 이 목표가 달성된다면 대형 병원뿐만 아니라 환자의 침상 옆이나 거리가 먼 시골의 작은 의원에서도 쉽고 빠르게 초정밀 암 검사를 받을 수 있게 된다. 또한, 이 센서는 크리스퍼 가위의 표적만 살짝 바꿔주면 암뿐만 아니라 치매(알츠하이머), 신종 바이러스, 박테리아 등 다양한 질병을 찾아내는 만능 탐지기로 변신할 수 있다.

아프기 전에 미리 질병을 찾아내어 싹을 자르는 ‘예방 의학’의 시대. 첨단 광학과 나노 기술, 그리고 유전자 편집 기술이 만나 빚어낸 이 작은 빛의 센서가, 다가올 암 치료의 미래를 얼마나 안전하고 따뜻하게 바꾸어 놓을지 그 무한한 가능성을 희망적으로 보여준다.

[편집실에서] 쏙쏙 이해되는 최첨단 과학 용어
바이오마커 (Biomarker): 단백질이나 DNA, RNA 등 우리 몸속의 변화를 알아낼 수 있는 생체 지표입니다. 암세포가 배출하는 쓰레기나 분비물을 통해 병의 유무를 확인하는 일종의 '혈흔' 같은 역할을 합니다.

제2 고조파 발생 (SHG, Second Harmonic Generation): 빛이 특정 물질을 통과할 때, 원래의 빛보다 파장이 딱 절반으로 짧은 새로운 빛이 튕겨 나오는 광학 현상입니다. 주변의 잡음(빛 번짐)을 없애고 선명한 신호만 얻을 수 있어 초정밀 센서에 주로 쓰입니다.

퀀텀닷 (Quantum Dot / 양자점): 전기를 가하거나 빛을 비추면 크기에 따라 스스로 선명하고 다양한 색을 내는 수 나노미터 크기의 초미세 반도체 입자입니다. 최근 최고급 TV 화질을 만드는 데도 쓰이는 물질입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CRISPR-Cas): 특정 유전자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내어 DNA 가닥을 싹둑 잘라내는 효소 단백질입니다. 유전병을 치료하거나 이번 연구처럼 특정 암 신호를 감지하는 데 폭넓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참고 자료]
"Amplification-free, single-molecule level biomarker detection", Optica.
뒤로월간암 2026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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