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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세포만 골라서 굶겨 죽이는 ‘거울 속의 분자’
구효정(cancerline@daum.net)기자2026년 04월 30일 19:43 분입력   총 89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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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작용 없이 암세포의 숨통을 끊는 'D-시스테인' 발견
암 환우들이 투병 과정에서 암 자체만큼이나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있다. 바로 항암 치료의 ‘부작용’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1세대 화학 항암제는 빠르게 분열하는 세포를 공격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때문에 무섭게 증식하는 암세포를 죽이는 데는 탁월하지만, 우리 몸에서 정상적으로 빠르게 자라나야 하는 머리카락, 위장 점막, 백혈구 등 건강한 세포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융단폭격을 맞게 된다. 탈모가 오고, 구역질이 나며, 면역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끔찍한 부작용은 모두 이 ‘구분 없는 공격’에서 비롯된다.

만약 우리 몸의 건강한 세포는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오직 암세포의 입에만 들어맞는 '독사과'를 먹여 암세포만 굶겨 죽일 수 있다면 어떨까? 최근 스위스 제네바 대학교(UNIGE)와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교의 국제 공동 연구진이 이 마법 같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줄 아주 특별한 분자를 찾아내어 국제 학술지 <네이처 메타볼리즘(Nature Metabolism)>에 발표했다. 암세포의 영양 공급줄만 정밀하게 끊어버리는 이 물질의 정체는 바로 ‘거울상 아미노산’이다.

왼손과 오른손의 비밀: 아미노산의 거울 세계
이 마법의 물질을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 몸을 구성하는 블록인 ‘아미노산’의 독특한 성질을 알아야 한다. 아미노산은 단백질을 만드는 작은 구슬들이다. 이 구슬들이 실에 꿰어지듯 연결되어 우리 몸의 근육, 장기, 효소 등을 만들어낸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20종류의 아미노산을 사용하는데, 아주 흥미롭게도 이 아미노산 분자들은 화학적 성분은 완벽히 똑같지만, 입체적인 생김새가 서로 대칭을 이루는 두 가지 형태(쌍둥이)로 존재한다.

마치 우리의 ‘왼손’과 ‘오른손’을 떠올리면 쉽다. 양손은 똑같이 생겼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일 뿐 결코 완벽하게 포개어지지 않는다. 왼손 장갑을 오른손에 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과학자들은 이를 각각 ‘L형(좌선성)’과 ‘D형(우선성)’이라고 부른다. 놀라운 것은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의 거의 모든 생명체는 단백질을 만들 때 오직 ‘L형(왼손)’ 아미노산만 편식해서 사용한다는 점이다. 반대쪽인 ‘D형(오른손)’ 아미노산은 우리 몸에서 거의 쓰이지 않기 때문에, 몸에 들어와도 건강한 세포들은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암세포의 전용 출입구를 파고든 독사과, ‘D-시스테인’
제네바 대학교의 장-클로드 마르티누(Jean-Claude Martinou) 교수팀은 이 점에 착안했다. "건강한 세포는 무시하지만, 암세포만 유독 주워 먹는 'D형(오른손)' 아미노산이 있지 않을까?“

수많은 아미노산을 테스트한 끝에, 연구팀은 황(Sulfur) 성분을 포함한 ‘D-시스테인(D-Cys)’이라는 물질이 특정 암세포의 성장을 아주 강력하게 억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가장 경이로운 점은 이 물질을 잔뜩 뿌려도 건강한 정상 세포들은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고 멀쩡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완벽한 표적 타격이 가능했을까? 비밀은 암세포 표면에만 나 있는 ‘전용 출입구(수송체)’에 있었다.

논문의 제1저자인 조제핀 장가리(Joséphine Zangari) 연구원은 “이 현상은 아주 쉽게 설명할 수 있다”며, “D-시스테인은 오직 특정 암세포의 표면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문(수송체)을 통해서만 세포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건강한 세포에는 이 문이 아예 없어서 독사과(D-시스테인)가 들어갈 수 없었고, 이 문을 많이 만들어둔 암세포들만 독사과를 덥석덥석 집어삼킨 것이다.

암세포의 발전소를 멈춰버리다
암세포 전용 출입구를 통과해 암세포 내부로 깊숙이 침투한 D-시스테인은 곧바로 무시무시한 파괴 공작을 시작한다. 타깃은 암세포의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심장부, 즉 ‘미토콘드리아(세포의 발전소)’다. 마르부르크 대학교의 롤란트 릴(Roland Lill) 교수팀의 분석에 따르면, D-시스테인은 미토콘드리아 안에서 일하는 ‘NFS1’이라는 핵심 효소의 목을 꽉 조여버린다. 이 효소는 세포가 숨을 쉬고(세포 호흡), 유전자를 복제(DNA 생산)하는 데 필요한 필수 부품인 ‘철-황 클러스터’를 만들어내는 공장장이다.

공장장(NFS1)이 마비되니 필수 부품이 끊기고, 암세포의 발전소는 가동을 멈춘다. 숨통이 막힌 암세포는 DNA가 손상되고, 더 이상 분열하지 못하며 성장이 완벽하게 멈춰버리게 된다. 문자 그대로 암세포를 내부에서부터 완전히 ‘굶겨 죽이는’ 것이다.

공격적인 유방암을 멈춰 세운 쥐 실험의 성공
이론이 아무리 완벽해도 실제 생명체에서 통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연구팀은 치료가 매우 까다롭고 악명 높은 ‘공격성 유방암(Mammary tumors)’에 걸린 쥐들에게 이 D-시스테인을 투여했다. 결과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암 덩어리의 성장 속도가 눈에 띄게 뚝 떨어졌으며, 그토록 걱정했던 다른 장기나 정상 세포의 부작용은 전혀 관찰되지 않았다. 항암 치료로 털이 빠지거나 앓아눕는 일 없이, 오직 유방암 덩어리만 서서히 굶어 죽어간 것이다.

완치를 향한 새롭고 희망찬 패러다임
이 거울 분자 치료법이 인간에게도 안전하게 적용될 수 있다면, 암 치료의 역사는 새롭게 쓰이게 될 것이다. 특히 이 분자를 쏙쏙 빨아들이는 ‘수송체’ 문을 가진 암 환자들에게는 부작용의 공포 없이 간단한 투약만으로 암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가장 이상적인 맞춤형 표적 치료제가 될 수 있다.

장-클로드 마르티누 교수는 “특정 암세포만 선택적으로 타격할 수 있다는 우리의 접근법이 옳았음을 보여주는 매우 긍정적인 신호”라며,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으로 나아가기 위해 속도를 내겠다고 밝혔다. 세상의 모든 독은 약이 될 수 있고, 반대로 생명을 만드는 아미노산도 거울에 비친 반대쪽 모습을 활용하면 암세포를 처단하는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건강한 세포는 보호하면서 암세포만 정밀하게 굶겨 죽이는 이 눈부신 발상의 전환이, 머지않아 혹독한 항암 치료에 지친 수많은 환우들에게 부작용 없는 편안한 완치의 길을 열어줄 수 있음을 매우 희망적으로 보여준다.

[Box] 쏙쏙 이해되는 의학 용어 사전
아미노산 (Amino Acid): 우리 몸의 근육, 장기, 효소 등을 구성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가장 작은 기본 블록(레고 조각)입니다.

거울상 이성질체 (Chirality): 왼손과 오른손처럼, 화학적 성분은 똑같지만 거울에 비친 것처럼 방향이 반대여서 서로 겹쳐지지 않는 입체 구조를 말합니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L형(왼손)' 아미노산만 사용합니다.

미토콘드리아 (Mitochondria): 세포가 살아가고 분열하는 데 필요한 모든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세포 내 화력발전소'입니다. 이번 연구에서 거울 분자(D-시스테인)가 바로 이 발전소를 고장 내어 암세포를 굶겨 죽였습니다.

[참조]
Joséphine Zangari, Oliver Stehling, Sven A. Freibert, Kaushik Bhattacharya, Florian Rouaud, Veronique Serre-Beinier, Kinsey Maundrell, Sylvie Montessuit, Sabrina Myriam Ferre, Evangelia Vartholomaiou, Vinzent Schulz, Karim Zuhra, Víctor González-Ruiz, Sahra Hanschke, Takashi Tsukamoto, Michaël Cerezo, Csaba Szabo, Serge Rudaz, Michal T. Boniecki, Miroslaw Cygler, Roland Lill, Jean-Claude Martinou. d-cysteine impairs tumour growth by inhibiting cysteine desulfurase NFS1. Nature Metabolism, 2025; 7 (8): 1646 DOI: 10.1038/s42255-025-013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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