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사
-> 특집기사
췌장암의 숨겨진 조력자, ‘신경망’을 차단하라
고동탄(bourree@kakao.com)기자2026년 05월 29일 16:19 분입력   총 72명 방문
AD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 암의 성장을 돕는 신경세포의 비밀을 밝혀내
췌장암은 조기 진단이 까다롭고, 안타깝게도 기존의 표준 치료에 잘 반응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수많은 환우와 가족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질환 중 하나다. 하지만 전 세계의 수많은 과학자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암이 더 널리 퍼지기 전에 그 뿌리를 뽑아낼 새로운 길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다.

최근 미국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CSHL) 연구팀은 췌장암의 발병 초기에 주목하여, 매우 흥미롭고 의미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바로 우리 몸의 ‘신경계’가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기부터 췌장암 세포의 성장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는 것이다. 이 발견은 향후 췌장암 치료의 판도를 바꿀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1. 암세포가 깔아놓은 고속도로, ‘신경’
의학계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암세포가 우리 몸의 신경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주의 깊게 관찰해 왔다. 데이비드 투브슨 교수 연구실의 제레미 니그리(Jeremy Nigri) 박사는 이를 ‘신경주위 침윤(Perineural invasion)’라는 현상으로 설명한다. 쉽게 말해, 암세포가 몸속에 퍼져있는 신경을 마치 고속도로처럼 타고 이동하며 다른 장기로 전이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은 암이 어느 정도 진행된 이후의 이야기였다. 암이 본격적인 종양 덩어리를 형성하기 전, 아주 초기 단계에서 신경과 암세포 사이에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오랫동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었다. 연구팀은 바로 이 초기 단계의 비밀의 문을 열기 위해 나섰다.

2. 평면을 넘어 3D로 들여다본 충격적인 진실
보통 현미경으로 세포를 관찰할 때는 얇게 썰어낸 단면, 즉 2D(평면) 이미지로 확인한다. 기존의 2D 평면 이미지에서 신경 섬유들은 그저 흩어져 있는 작은 점들처럼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연구팀은 ‘전조직 면역형광법(Whole-mount immunofluorescence)’이라는 최첨단 3D 영상 기술을 동원해, 췌장 조직 내부를 입체적으로 들여다보았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작은 점인 줄로만 알았던 신경 섬유들이, 사실은 종양 세포 주변을 칭칭 감은 채 매우 두껍고 촘촘한 그물망처럼 얽혀 있었다.

니그리 박사는 “처음 이 3D 사진을 보았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2D로만 보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그곳에 있었다”고 회상했다. 신경들은 암세포 주변을 우연히 지나가던 것이 아니라, 암세포와 매우 깊숙하게 결탁해 거대한 조직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3. 암세포와 신경의 치명적인 ‘악순환 고리’
그렇다면 어떻게 이토록 촘촘한 신경망이 암세포 주변에 형성될 수 있었을까? 연구팀은 쥐와 인간의 세포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은밀하고 치명적인 ‘피드백 루프(악순환 고리)’를 발견해 냈다. 췌장 내부에는 종양의 성장을 돕는 나쁜 일꾼인 ‘종양 촉진 섬유아세포(myCAFs)’가 존재한다. 이 나쁜 일꾼들은 주변의 신경 섬유(특히 교감신경)를 자신들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기는 화학 신호를 보낸다.

부름을 받고 달려온 교감신경은 위급 상황에서 분비되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노르에피네프린(Norepinephrine)’를 뿜어낸다. 이 호르몬이 섬유아세포에 닿으면, 세포 내부의 칼슘 수치가 급격히 치솟으면서 섬유아세포가 더욱 미친 듯이 활성화된다.

즉, 나쁜 일꾼(섬유아세포)이 신경을 부르고 ➔ 신경이 호르몬을 뿌려 일꾼들을 더욱 폭주하게 만들고 ➔ 폭주한 일꾼들이 암이 자라기 좋은 환경을 다지면서 ➔ 또다시 더 많은 신경을 끌어들이는 ‘악순환’가 반복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본격적인 암 덩어리가 보이기도 전인 초기 단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4. 악순환을 끊어라: 50% 줄어든 종양 성장
원리를 알았으니 해결책을 찾을 차례다. 연구팀은 이 지독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실험했다. 그들은 신경독소를 사용해 교감신경계의 활동을 차단해 보았다. 암세포를 돕기 위해 분비되던 신경 신호가 끊기자, 폭주하던 섬유아세포의 활동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그 결과 종양의 성장이 거의 50% 가까이 억제되는 놀라운 결과를 얻었다. 신경망이라는 ‘보급로’를 끊어버리자 암세포가 힘을 잃기 시작한 것이다.

5. 새로운 표적 치료의 희망적인 미래
이번 연구가 더욱 가치 있는 이유는, 암의 전이 경로로만 여겨졌던 신경망을 ‘암의 성장을 막는 새로운 표적’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암의 아주 초기 단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이를 일찍 차단할수록 치료 효과는 더욱 극대화될 수 있다.

연구팀은 기존에 고혈압이나 전립선 비대증 치료제로 사용되던 ‘독사조신(Doxazosin)’와 같은 약물들이 교감신경의 신호를 차단하는 데 유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기존 약물들을 현재의 항암 화학요법이나 면역항암제와 함께 병용 투여한다면, 췌장암 치료의 효율을 한층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니그리 박사는 “우리의 다음 목표는 이 섬유아세포와 신경 사이의 대화를 완벽하게 차단할 방법을 더 구체적으로 찾아내는 것”이라며, “앞으로 이 연구가 췌장암 환자들의 치료 성적을 향상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게 될 것이라 희망적으로 내다본다.”라고 전했다.

췌장암이라는 견고한 성벽에도 과학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작은 틈이 생기고 있다. 종양의 숨겨진 조력자인 ‘신경망’을 차단하는 이 새로운 접근법이, 수많은 환우에게 새로운 치료의 길을 열어주는 든든한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한다.

[편집실에서] 쏙쏙 이해되는 의학 용어 사전
종양 촉진 섬유아세포 (myCAFs): 원래 섬유아세포는 우리 몸의 상처를 재생하고 조직을 지탱해 주는 착한 세포다. 하지만 암세포의 꼬임에 넘어가면, 암세포가 공격받지 않고 쑥쑥 자랄 수 있도록 둥지를 틀어주는 ‘나쁜 조력자’로 변하게 된다.

교감신경계 (Sympathetic nervous system): 우리가 깜짝 놀라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심장을 빨리 뛰게 하고 근육을 긴장시켜 ‘싸우거나 도망치도록(Fight or flight)’ 몸을 준비시키는 신경망이다.

노르에피네프린 (Norepinephrine): 교감신경이 자극받을 때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이자 호르몬. 이번 연구에서는 이 물질이 췌장암 주변의 섬유아세포를 과도하게 흥분시키는 방아쇠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기사는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의 최신 연구 발표를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참조:
Jérémy Nigri, Wenjun Lan, Melanie L. Fung, Charlotte Kayser, Astrid Deschênes, Juliene Hinds, Sanjeev Kaushalya, Sara A. Pawlak, Jennifer S. Thalappillil, Sandeep Nadella, Marc Hilmi, Wungki Park, Rajya Kappagantula, Youngkyu Park, Zhen Zhao, Jonathan Preall, Christine A. Iacobuzio-Donahue, Kevin J. Tracey, Jeremy C. Borniger, David A. Tuveson. Myofibroblasts induce neuroplasticity to promote pancreatic inflammation and cancer progression. Cancer Discovery, 2026; DOI: 10.1158/2159-8290.CD-25-1337
뒤로월간암 2026년5월호
추천 컨텐츠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