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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안내 - 여기에 사는 즐거움
고정혁기자2012년 02월 22일 17:13 분입력   총 831575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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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내내 정말로 시골에 내려오길 잘했구나 싶었다. 겨우내 잠자고 있던 씨앗들이 따스한 봄이 되자 아우성을 치며 땅 위로 돋아났다. 그 많은 새싹들 중에는 봄나물들이 수두룩하다.

봄이 오자마자 산이며 들에 제일 먼저 올라오는 건 가장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민들레이다. 민들레의 여린 잎은 뜯어다 초장에 산뜻하게 무쳐 먹거나 쌈을 싸 먹을 수 있다. 아직 여린 잎이라서 싱그러운 풋내나 쌉싸래한 맛이 입맛을 돋우며, 겨우내 묵었던 군내 나는 입안을 말끔히 씻어준다. 민들레는 잎과 꽃봉오리도 먹을 수 있다. 노오란 꽃이 불현듯 민들레 홀씨가 된다. 그러다가 가볍게 훨훨 떠난다. 민들레는 마치 한 여인의 일생과도 같다. 주고 또 주고 다 주고 나서 하얗게 쇠어버리는 우리네 할머니 같다.

민들레가 돋기 시작하면 냇가의 얼음이 채 녹기도 전에 미나리가 돋아난다. 미나리를 캐다가 살짝 데쳐서 무쳐 먹으면 입 안에 미나리의 향기가 가득찬다. 미나리는 추운 겨울에도 얼지 않는 푸르름을 간직한 강인한 향이다. 넘어져도 고꾸라져도 다시 일어설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진한 향을 닮았다.

미나리가 동네 개울가에 돋으면 봄나물의 큰 언니인 냉이가 밭에 꼬물꼬물 얼굴을 내민다. 묵은 냉이는 묵은대로, 햇냉이는 햇냉이대로 다 맛있다. 묵은 냉이는 향이 짙고 햇냉이는 산뜻하다. 냉이를 캐다가 살짝 데쳐서 된장국을 끓이면 그 구수하고 향긋한 냄새가 백리를 진동한다. 냉이는 된장과 궁합이 잘 맞는다. 된장에 갖은 양념을 넣어 무쳐도 먹고, 튀김을 해먹어도 별미다. 냉이의 생김새는 다른 나물에 비해 독특하다. 긴 뿌리에 잎은 펑크 스타일이다.
냉이가 한창일 때 항상 같이 짝을 맞추는 나물은 냉이의 단짝 친구 달래다. 냉이가 멋쟁이 언니라면 달래는 개성 있는 친구라 할 수 있다. 달래는 생으로 무쳐 먹으면 좋고, 김치를 담가도 좋다. 맛이 독특하게 진하게 맵싸한 달래는 된장찌개에 넣기도 하고 양념장을 만들어 비벼 먹어도 좋다. 곤드레나 취나물에 넣고 밥을 한 다음에 달래 양념장에 비벼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뭐니 뭐니 해도 봄나물의 민중사는 쑥이 쓸 것이다. 지천에 흔하디흔한 쑥은 원자폭탄이 터져 폐허가 된 히로시마의 잿더미 사이에서 가장 먼저 싹을 틔웠다. 민초의 끈질긴 생명력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풀이요, 나물이다. 4월 초에 나오는 어린 쑥은 애탕국을 끓이거나 생나물로 무쳐 먹고, 된장국에 지져 먹거나 쌀가루에 버무려 쑥버무리를 해먹는다. 조금 크면 향도 점점 진해지는데 뜯어다가 개떡을 만들어 쪄 먹고, 데친 후에 곱게 다져서 쑥전을 부쳐 먹는다. 말렸다가 가루 내어 미숫가루에 타 먹어도 좋다. 다 자란 쑥은 대째로 베어 말렸다가 모깃불을 놓기도 하고 인진쑥을 뜸을 뜨는데 좋다. 휘뚜루마뚜루 먹고 쓰고 바르고 쬐이고 붙이고……. 할머니 약손과도 같은 나물이다.

쑥이 성할 무렵에는 온 천지가 나물투성이다. 이름 모를 나물들이 지천에 깔려 있어 조금만 부지런하다면 찬거리를 사먹을 필요가 없다. 잘 찾아보면 밭두렁 어딘가에 씀바귀도 있고, 고들빼기도 있다. 그것들을 캐어와 소금물에 삭혔다가 김치를 담그면 쌉싸래한 맛이 일품이다. 둥글둥글한 머윗잎은 손바닥보다 약간 작을까 싶을 때 뜯어와 데쳐서 쌈을 싸먹으면 곰취만큼 맛있다. 이것을 조금 더 키우면 늦봄에는 줄기가 새끼손가락만큼 굵어지는데 그 머윗대를 잘라다 데쳐서 껍질을 벗겨 들깨가루에 볶으면 그 향과 씹는 맛이 또한 일품이다.

취나물이 한창일 때에 우리 집 장독대 앞에는 작년에 어머니가 술술 뿌려 놓은 돌나물이 떼로 몰려 도토리 키 재기를 한다. 초록색 융 담요를 깔아 놓은 듯한 촘촘한 짜임새와 아기자기한 잎 모양이다. 고놈들을 살살 뜯어다가 생으로 무쳐내면 신선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초장에 무쳐 먹어야 제 맛이 나고, 풀죽을 묽게 쑤어 물김치를 담가 먹어도 좋다. 일 년 중 지금밖에 먹을 수 없는 귀한 음식이기도 하다. 잎이 연해서 아기 엉덩이 주무르듯이 살살 다뤄야 한다. 돌나물 물김치를 담가 놓은 다음에 눈을 조금 넓게 두면 지금은 먹지 않지만 예전에는 먹었던 망치, 지칭개, 명아주, 질경이 같이 길바닥에 흔히 나는 풀들도 찾아 볼 수 있다.

봄 내내 밭두렁 논두렁에서 나물을 캐고 뜯고 베어 많이 먹었다. 나는 나물을 캘 때가 가장 즐겁다. 일본의 시인이자 환경운동가인 야마오 산세이가 무인도에 살면서 '여기에 사는 즐거움'이라는 말을 썼는데 그 말이 진심으로 이해가 된다. 여기에 사는 즐거움이란 여기에 사는 슬픔, 고통, 외로움까지 포함한 말이다. 이 모든 감정을 다 아우르는 즐거움인 것이다.

앞으로 나는 시시때때로 비듬나물도 뜯고, 아카시아꽃이며 호박잎, 더덕, 뽕잎, 가죽잎이며 지천의 잎사귀들, 뿌리, 줄기를 뜯을 것이다. 그 향을 맡으며 따스한 햇살과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과 구수한 흙냄새를 맡고,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을 것이다. 내가 즐거운 것은 단지 내 입으로 들어가는 먹을거리를 마련해서만은 아니다.

화창한 봄날 어디든 가서 땅 속에서 나오는 것들을 바라보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꼬물꼬물 간지러운 즐거움이 피어오른다. 봄마다 내 가슴에도 새순이 올라온다. 자연 속에서 거져 난 것들을 주우며 땅에 감사하고 하늘에 감사한다.

<착한 밥상 이야기>, 윤혜신, 동녘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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